노트북 덮고 무작정 나선 시카고 다운타운: 5월의 밀레니엄 파크와 신디스 루프탑
시카고 웨스트 서버브(West Suburbs)에 위치한 집에서 재택근무를 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물리적인 출퇴근이 없다 보니 일과 삶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매일 아침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동네를 15분 정도 걷고 들어오는 저만의 '가짜 출퇴근(Fake Commute)' 루틴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죠. 그런데 오늘 아침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이건 도저히 모니터 앞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는 날씨라는 걸 직감했습니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에 온도는 화씨 70도(섭씨 약 21도), 습도도 낮아 공기가 무척이나 가볍고 상쾌했습니다. 길고 끔찍했던 미드웨스트의 겨울을 견뎌낸 사람이라면, 이런 5월의 완벽한 봄날은 무조건 밖으로 나가서 즐겨주는 것이 예의입니다. 결국 오전 급한 업무만 대충 마무리 지어놓고 노트북을 덮은 뒤, 홀린 듯 차를 몰고 시카고 다운타운으로 향했습니다.
복잡한 고속도로를 뚫고 루프(Loop) 지역에 도착해 차를 댄 후, 가장 먼저 발걸음을 옮긴 곳은 시카고의 랜드마크인 밀레니엄 파크(Millennium Park)입니다. 사실 이 동네에 오래 살다 보면 관광객들로 바글바글한 다운타운 한복판은 웬만하면 피하고 싶어지지만, 1년 중 딱 이맘때, 5월의 밀레니엄 파크만큼은 예외입니다. 칙칙했던 회색빛 도시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는 이 시기에는 그냥 공원을 걷는 것만으로도 복잡했던 머릿속이 환기되는 기분이 들거든요.
은빛 콩과 보랏빛 정원, 공원을 즐기는 두 가지 방법
공원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거대한 은빛 물방울 모양의 조형물인 클라우드 게이트(Cloud Gate), 로컬들이 흔히 '더 빈(The Bean)'이라고 부르는 녀석이 반겨줍니다. 매번 보는 구조물이지만, 오늘처럼 맑은 날 거대한 스테인리스 스틸 표면에 시카고의 스카이라인과 파란 하늘이 왜곡되어 반사되는 모습은 언제 봐도 참 신기합니다. 주변에는 전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이 저마다 독특한 포즈로 인증샷을 남기느라 정신이 없죠. 저도 그 틈에 끼어 조형물 밑으로 들어가 찌그러진 제 모습과 낯설게 변한 빌딩 숲을 카메라에 한 장 담아봅니다. IT 업계에서 매일 정형화된 데이터와 로직만 다루다가, 이렇게 기하학적이고 비정형적인 예술 작품을 마주하면 묘한 해방감이 듭니다.
하지만 관광객들이 주로 콩 모양 조형물 앞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것과 달리, 제가 이 공원에서 정말 좋아하는 공간은 남쪽으로 조금 더 걸어 내려가면 나오는 루리 가든(Lurie Garden)입니다. 특히 5월의 루리 가든은 늦봄에 만개하는 보라색 샐비어(Salvia)가 마치 물결처럼 정원을 가득 채우는데, 그 풍경이 정말 장관입니다. 사방이 차갑고 높은 빌딩들로 꽉 막힌 도심 한가운데에, 이렇게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핀 산책로가 있다는 건 엄청난 축복이죠.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잘 정돈된 정원 길을 천천히 걷다 보면, 어제 새벽까지 씨름했던 서버 에러 로그나 복잡한 시스템 아키텍처 같은 건 머릿속에서 하얗게 지워집니다.
루프탑에서 내려다보는 시카고의 5월, 신디스(Cindy's)
햇살을 받으며 공원을 한참 걷다 보니 제법 다리도 뻐근해지고 시원한 마실 거리가 간절해집니다. 이럴 때 제가 참새 방앗간처럼 들르는 곳이 있습니다. 밀레니엄 파크 바로 길 건너편, 미시간 애비뉴에 있는 유서 깊은 건물인 시카고 애슬레틱 어소시에이션(Chicago Athletic Association) 호텔 꼭대기에 위치한 신디스 루프탑(Cindy's Rooftop)입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바 안으로 들어서면, 마치 호숫가에 있는 부잣집 별장에 놀러 온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곳의 진짜 무기는 인테리어가 아니라 야외 테라스로 나갔을 때 펼쳐지는 뷰입니다. 난간에 기대어 서면, 방금 전까지 제가 걸었던 밀레니엄 파크 전체가 미니어처처럼 발아래 깔리고, 그 너머로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미시간 호수가 시원하게 펼쳐집니다. 바다처럼 넓은 호수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걸 보고 있으면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죠.
여기서 로컬 아재의 작은 요령을 하나 공유하자면, 신디스는 워낙 유명한 뷰맛집이라 점심이나 저녁 피크타임에 가면 자리 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사람들에 치여서 제대로 경치를 구경하기도 힘들죠. 그래서 저는 애매한 시간인 오후 3시쯤 방문하는 걸 선호합니다. 이 시간에 가면 그나마 숨통이 좀 트여서 테라스 명당자리도 눈치껏 차지할 수 있거든요.
자릿세가 아깝지 않은 한 잔의 여유
운 좋게 뷰가 좋은 자리를 잡고, 이곳의 시그니처인 보태니컬 베이스의 진(Gin) 칵테일을 한 잔 주문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칵테일 한 잔에 20불 가까이 하는 가격은 꽤 사악한 편입니다. 하지만 허브향이 기분 좋게 올라오는 시원한 칵테일로 목을 축이고, 뺨에 닿는 기분 좋은 호숫바람을 맞으며 시카고 최고의 스카이라인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그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싹 사라집니다. 그저 뷰를 빌리는 자릿세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죠.
칵테일을 반쯤 비웠을 때, 가져온 노트북을 바 테이블 구석에 슬쩍 열고 클라이언트에게서 온 급한 이메일 몇 개를 처리했습니다. 회색 파티션으로 둘러싸인 사무실이 아니라, 미시간 호수를 배경 화면 삼아 일하는 기분. 1인 기업가이자 디지털 노마드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가장 꿀맛 같은 순간 중 하나입니다.
적당히 쉬며 재충전도 했으니, 이제 차가 막히는 퇴근 지옥철이 시작되기 전에 다시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합니다. 비록 반나절의 짧은 땡땡이였지만, 5월 시카고의 눈부신 햇살과 신디스 루프탑에서의 여유로운 칵테일 한 잔은 팍팍한 일상을 굴러가게 하는 아주 좋은 윤활유가 되어주었습니다. 날씨가 더워지고 관광객이 몰려오는 여름이 오기 전, 조만간 또 핑계를 만들어 이 도심 속으로 도망쳐 나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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